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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카이브 트렌드 속 시팅 서울의 위치
조옥림
한국에서의 아카이브 담론은 지난 10여 년간 한층 무르익으며 문화계 안팎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수집과 보존에 대한 공감과 가치가 확산되어 왔다. 실물 아카이브 자료들은 무수한 전시장에서 작품이나 작가의 원작성과 역사성을 드러내는 장치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또한 브랜드 가치를 강조하는 마케팅 문구나 기관의 정보화 전략, 더 나아가 아카이브와 컬렉션 데이터가 시각화 서비스 및 비즈니스로 확장되는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디자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카이브에 대한 문제의식과 실천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한국 디자인사의 정립과 정체성 모색 과정에서 아카이브의 부재에 대한 갈증이 높아지던 시기,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부재하는 아카이브: 디자인, 건축, 시각문화’라는 연구 포럼이 열리기도 했다. 이 포럼에서는 아직 공적 아카이브가 미비한 국내 상황에서 건축이나 디자인 장르가 어떻게 전시와 출판 행위를 통해 아카이브 실천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가 함께 논의되었다.
전시나 아카이브 행위의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 국내 디자이너들의 자기 기록 차원의 수집과 전시, 출판 활동은 2010년대 이후 점차 늘어나 지금은 익숙한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디자인계에서도 특히 그래픽 디자인 장르에서 활발히 나타나며, 연대기적 기록과 회고전의 형식을 주로 취해왔다. 더불어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들의 작업 프로세스 기록물과 프로토타입 수집 전시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 디자인계의 아카이브 열망에는 존재론적 차원의 노력이 담겨 있다. 이는 한국 디자인계의 특수성으로도 보인다. 개별 디자이너들의 아카이브와 전시 행위는 수집과 기록 과정에서 디자이너가 스스로 서사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실천적 자기 서술의 양상을 띤다. 여기서의 실천은 ‘아카이브’라는 지식의 단위나 ‘아카이빙’이라는 행위가 디자이너들에게 자기 탐색과 더불어 작업물의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의미를 전시를 통해 대화하려는 태도로 나타난다. 나아가 디자이너들이 이를 주체적으로 하나의 디자인 활동 문법으로 삼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팅 서울은 이러한 국내 디자인계의 아카이브 열풍 속에서 송봉규, 소동호, 양정모 세 디자이너가 2020년에 시작한 서울 기반의 의자 아카이브 프로젝트다. “서울에도 의자 디자이너가 있는가”라는 한 외국 디자이너의 질문에서 출발한 시팅 서울의 지향점은 21세기 서울 의자 디자인의 지형도를 구성해 가는 데 있다.
시팅 서울의 의자 아카이브
시팅 서울은 ‘서울’이라는 장소적 맥락과 ‘2000년 이후’라는 시간적 맥락을 기준으로 서울에서 다양한 배경으로 등장하는 의자들을 포착하고 소개하는 플랫폼이다. 시팅 서울의 의자 아카이브는 완결된 형태가 아닌, 계속 생성되는 아카이브로 한 걸음씩 성장해가고 있다. 온라인 아카이브 웹사이트를 기반으로 2020년 문화역서울284에서의 첫 전시 <Seating Seoul: Chair Archive in Seoul, 21st Century>를 시작으로, 같은 해 온양민속박물관 구정아트센터의 <시팅서울: Enjoyment of Everyday Life>, 2022년 을지로 지하상가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전시 <Spectrum of Seating> 등을 이어왔다.
올해 열리는 네 번째 전시에서는 아카이브 데이터 체계와 범위에 대한 고민을 반영해 100개의 의자를 소개한다. 시팅 서울은 아카이브의 지속성을 위해 선정 기준과 정보 범위, 관리 방식의 전문성 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개별 의자 데이터를 인물과 사물로 구분하고, 시팅 서울 고유의 선정 이력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준비 중이다.
장기적으로는 완성된 의자 이면의 제작 과정과 산업적, 기술적, 사회적 맥락을 아우르는 기록을 실천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재료와 기법에 대한 기술 정보뿐 아니라 협업 제작소와 협업자, 전시와 출판, 소장 이력, 클라이언트 또는 커미셔너에 관한 배경 데이터를 함께 관리함으로써 정확한 인물 및 작업 정보의 열람과 출처로 기능하는 아카이브를 구축하려 한다. 또한 참여자의 저작권 보호와 향후 개인, 기업, 기관과의 협업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고 있다.
시팅 서울의 의자는 무엇을 발화하는가
시팅 서울의 의자 아카이브는 아직 감각을 쌓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 과정에서 2020년 첫 전시부터 지속해온 군집형 디스플레이는 유효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20세기 서구의 의자 조형과 브랜드 이미지에 익숙한 대중에게 시팅 서울의 의자들은 새로운 시각적 경험이자 훈련이다. 지금까지 선정된 의자들이 만들어내는 집합적 인상에서 읽히는 점은 서울에서 태어난 의자들의 조형 언어와 실험 정신이 20세기 고전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의자들은 시각적 인상을 넘어, 디자이너들이 체득한 무형의 지식과 시대 감각, 디자인 개념과 언어를 담고 있다. 시팅 서울 아카이브는 이러한 요소들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과정을 통해 동시대 디자인의 고유성과 진화를 함께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이 곧 시팅 서울이 추구하는 아카이브의 방향이자 차별화된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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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시팅 서울 전시 서문
시팅 서울
27개의 의자, 27가지 시선-스펙트럼 오브 시팅
의자는 리빙 디자인 트렌드 또는 스타일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가구다. 우리는 매일 의자에 앉아 일을 하고,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다. 공간의 기능이 의자에 의해 실현되고, 의자에 앉는 순서나 배치에 따라 사람들의 관계가 정의되기도 한다.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27명의 디자이너가 제작한 27개의 의자가 한 공간에 놓였다.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위해 재활용 소재를 활용한 의자, 진정한 휴식을 위한 의자, 일상에 즐거움을 제공할 오브제로서의 의자 등 현업에 있는 디자이너, 공예가들이 각자의 재료를 통해 의자의 새로운 개념과 형태를 탐구한 결과다.
세 명의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를 통해 각 참여 작가의 시선으로 의자를 새롭게 바라본다. 참여 작가는 물론, 관람객들이 더 넓은 관점으로 의자를 대할 수 있도록, ‘CHAIR’ 대신 ‘SEATING’이라는 단어로 의자를 칭했다.
전시는 산업적·공예적 재료와 구조를 고찰하는 매개로서 의자를 다룬다. 이를 통해 단순한 기능을 하는 소비재가 아닌 ‘앉는 행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고자 한다. 더 많은 사람이 국내 디자이너들의 의자를 향유하고, 즐기고, 소비하길 바라며, 새로운 생산자와 컬렉터가 소통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일시 2022. 9. 2. – 10. 2.
장소 DDP 디자인랩 1층 디자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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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디자인재단, 의자의 한계는 어디까지? ‘스펙트럼 오브 시팅’ 전시 DDP서 오픈
뉴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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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의 화려한 변신 ‘스펙트럼 오브 시팅’
브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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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떠난 의자에는 공허만 남아
육상수
자리(seating)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space), 몸이나 물건이 어떤 변화를 겪고 난 후 남은 흔적(tracks),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지정한 곳(place)으로 정의하고 있다. 의자는 이 가운데서 곳(place)에 한정해 제작된 기물로 자리의 형이하학적 구조를 지닌다.
자리의 인문학적 의미
의자는 공간(space), 흔적(tracks), 곳(place)의 상징되는 자리(seating)를 수용한 물체적 시그널이다. 그런 이유로 위에 언급된 세 개념을 실행하는 몸체로서, 사용자의 삶과 행동의 역사성을 인문학적 구조로 치환하는 상징적 도구이기도 하다.
의자는 도구적 물질성만큼이나 상징적 의미를 가진 매우 독특한 가구 중 하나다. 다시 말해 의자라는 단순한 사용 목적의 이면에는 ‘아버지의 의자’와 같은 삶이라는 시공간적 비물질성도 내포하고 있다.
55년 동안 한 남자를 사랑한 ‘의자 수리공’ 여인의 이야기를 기술한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단편 소설 ‹의자 고치는 여인›, 그리고 버려진 의자처럼 자신의 삶이 비천하다고 생각하는 가구점 사장 딸, 물질만능주의 가구점 사장, 도서관 의자에 마음 뺏긴 젊은 남자, 고가의 의자를 과소비 하는 남편을 이해 못하는 아내의 이야기 등의 4가지 에피소드로 구성한 연극 ‹의자는 잘 못 없다› 또 고립된 섬에서 살아가는 부부의 권태와 외로움 그리고 망상과 폭력성 그 후의 다시 공허를 연기한 연극 ‹의자들›이 바로 실체적 의자 그 이상의 문학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일본 소설가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 소설집 ‹인간의자›는 의자라는 공간에 숨어든 주인공이 타인의 공간에 침투해 일거수일투족을 훑어내리는 공포의 카타르시스를 담고 있다.
“제 전문은 의자를 만드는 일입니다. 제가 만든 의자는 아무리 어려운 주문을 한 손님이라도 무조건 마음에 들어 하기 때문에, 많은 거래처에서 저를 잘 봐주고 좋은 일만 안겨주었습니다. ‘좋은 일’이라 하면 등받이나 팔걸이에 어려운 조각을 넣는 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주문이 있기도 하고, 쿠션의 종류나 각 부분의 치수 등에 세세한 취향을 반영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 특별 주문 의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초보 직공은 상상하지도 못할 고민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고심하면 할수록 의자가 완성되었을 때 얻는 유쾌함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이 커집니다. 감히 비유하자면, 그 느낌은 예술가가 훌륭한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기쁨에 견주어야 할 정도입니다.” -기능적 의자
“드디어 완성된 의자를 보고 저는 이전까지 느껴본 적 없는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만들었지만, 넋을 놓고 볼 만큼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의자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랬듯이 네 개가 한 세트로 구성된 의자 중 하나를 해가 잘 드는 마루로 가지고 나가서 편안히 앉아봤습니다. 그 느낌이 얼마나 좋던지! 부드럽게 몸을 감싸주며 너무 딱딱하지도 않고 너무 부드럽지도 않은 쿠션의 탄력, 굳이 염색하지 않은 회색빛 원단을 이어붙인 가죽의 감촉, 적당한 경사를 유지하여 가만히 등을 받쳐주는 꽉 찬 등받이, 섬세한 곡선을 그리며 볼록 솟아 있는 양측의 팔걸이, 그 모든 것이 신기한 조화를 이루며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마치 ‘안락함’이라는 단어가 형태를 갖춰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습니다.” -정서적 의자
“저는 서둘러 네 개의 의자 중 가장 완벽하게 완성된 팔걸이의자 하나를 모조리 해체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의자를 저의 이상한 계획을 실행하기에 알맞은 모습으로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커다란 팔걸이의자였는데, 앉는 부분이 바닥에 닿을 법한 지점까지 가죽이 둘려 있고, 등받이나 팔걸이가 상당히 두꺼웠습니다. 그 안에 사람이 한 명 숨어 있어도 바깥에서는 절대 모를 정도로 커다란 동굴이 있는 셈이었지요. 물론 의자 안에는 튼튼한 나무틀과 많은 스프링이 있었는데, 저는 그것들을 적절히 손봐서 사람이 앉는 부분에 무릎을 집어넣고 등받이 안에 상반신을 끼워서 사람이 정확히 의자 형상으로 앉으면 그 속에 숨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목적성 의자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제가 행한 이 기묘한 행위의 첫 번째 목적은 사람들이 없는 틈에 의자에서 빠져나와 호텔 안을 돌아다니며 도둑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자 안에 사람이 숨어 있다니, 그런 멍청한 짓을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저는 그림자처럼 자유자재로 이 방 저 방을 헤집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질 즈음이면 의자 속 비밀 공간으로 도망쳐서 숨죽이고 그들이 도둑을 찾는 멍청한 행동을 지켜보면 되는 것이죠.” -욕망의 의자
한 소설에서 하나의 의자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완전히 다른 기능과 용도로 해체,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의자라는 도구가 한 남자의 목적에 의해 자신의 인생 골격까지 감당해내는 사물로서 그 역할과 목적은 상상을 초월하는 문학성을 상징한다.
자리에서 의자 다시 의자에서 자리로
자리가 사람의 역사를 기록하는 은유의 무형이라면, 그것을 실체적으로 구현한 사물이 바로 의자다. 하지만 좌식 문화로 이어진 한국인에게 의자는 10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때문인지는 몰라도 불행하게도 우리는 세계적 의자나 그것을 만든 디자이너를 얻지 못했다. 의자의 구조, 형태, 재료, 기술, 디자인 등은 서양의 전유물이다. 하지만 궁색한 제안일 수도 있겠으나 실용성으로부터 잉태한 서양식 의자보다, 방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일어나 의자로 향한 우리의 문화적 상상력이 앞으로 의자 디자인에 있어 더욱 풍부하게 피어나지 않을까 조심히 예견해 본다.
의자는 그 기능에 따라 스툴, 벤치, 소파 등으로 나뉘지만 그 역할은 모두 몸을 의지하는 기능에 종속된다. 하지만 오브제적 의자는 기능의 제약에서 벗어나 사물의 정서를 극대화한다. 작가의 세계관, 정서, 물질성, 구조, 형태의 자유분방함이 유독 의자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자리에서 이어지는 의자만이 가지는 독특한 인문적 정서와 입체 구조에 있다.
아카이브 시팅서울(seating seoul)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만든 의자의 기록 창고이면서 동시에 자리가 의미하는 사람의 시공간과 흔적, 장소를 용해해서 저장한 디지로그(digilog) 서브이기도 하다.
사람이 떠난 의자에는 쓸쓸한 공허가 내려앉는다. 용도가 폐기되지 않는, 그래서 누군가의 무거운 몸을 수용하고, 공간을 구성하고, 일상의 역사를 기록하는 그 모든 과정에 가구 디자이너의 시대적 책임이 동행한다. 시팅서울은 의자 디자인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삶의 궤적을 일구는 실존의 공간으로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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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팅 서울, 의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김상규
‹시팅 서울› 전시를 보기 위해서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쳤다. 문화역서울284에 가려면 피할 수 없는데 어느 방향에서든 섬 같은 서울역 광장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소음 가득한 광장에 몸을 의지한 사람들 곁을 지나서 섬 속의 섬 같은 전시장에 다다랐다. 대유행 상황이라 관람객은 광장에서 유리 너머로 전시된 의자들을 봐야 했다. 운 좋게 전시장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유리 너머로 조금 전 지나쳐온 광장의 사람들이 보였다.
전시장의 의자는 앉는 사람이 없고 유리 너머 사람들은 마땅히 앉을 데가 없다. 단절된 작은 공간에 자리 잡은 이 의자들은 한창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창작한 것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익히 아는, 어쩌면 남부러울 것 없는 특별한 의자들이다. 하지만 해외의 이름 있는 의자들에 비하면 아직 사람들 눈에 익지 않았다.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유리로 나뉜 두 세계가 달라 보여도 안이나 밖이나 자기만의 자리가 필요하긴 매한가지였다.
‹시팅 서울› 프로젝트는 이 도시 창작자들로부터 탄생한 의자들을 기록하고 알리는 것이니 그들에게 특별한 자리를 만들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의자에게 자리를 만들어 준다니 이상하게 들릴 법 하다. 이 프로젝트의 공동 기획자인 소동호, 송봉규, 양정모가 밝힌 것처럼 ‘서울 태생’이라고 할 만한 의자들이 눈여겨 볼만한 수준이 되었고 한 자리에서 그것을 확인해 볼 때도 되었다. 2000년 이후에 디자인된 의자 중에서 1차로 100개를 수집했으니 적지 않은 수다. 지난 이십 년간 주목할 만한 결과물도 쌓였으니 뛰어난 감각으로 멋진 의자를 디자인할 수 있고 솜씨 있게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전시된 일부 의자만 보더라도 빼어난 디자인인데 이렇게 디자이너들이 직접 나서서 수집하고 알리는 것을 보면 그에 걸맞은 반응을 얻지 못한 상태다. 의자의 완성도나 매력이 부족하거나 사람들의 안목이 부족한 탓일까?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의자 자체가 너무 간절하기 때문이다. 앉을 곳이 없고 마음 편히 앉기가 어려워서, 의자를 찬찬히 보고 그것의 의미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흔히 의자를 달라는 것은 일할 수 있는 기회 또는 정상적으로 근무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실제로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80조에 ‘의자의 비치’라는 항목이 있을 정도다.(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작업 중 때때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해당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갖추어 두어야 한다)
한편, 초대받은 자리임에도 빈 의자로 남은 경우가 있다. 2010년 12월 10일에 열린 노벨상 시상식의 빈 의자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작가 류사오보(劉曉波)를 위한 자리지만 중국 정부가 당사자는 물론, 가족과 친인척을 모두 출국 금지했기 때문에 그 의자에는 노벨상 메달과 증서가 놓였다. 같은 해 칸 영화제에도 빈 의자가 있었다. 이란의 영화감독인 자파르 파나히(Jafar Panahi) 감독이 앉아야 할 의자였다. 반체제 활동 혐의 때문에 20년간 영화 관련 활동 및 출국, 언론 인터뷰를 할 수 없었던 그는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았으나 역시나 출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빈 의자들은 안타까움과 항의의 표시였다. 그렇다면 시팅 서울의 ‘빈 의자들’은 무엇일까. 독특하게 입자들을 고착시킨 최성일의 ‘랜덤 스툴(Random Stool)’, 소재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익숙한 비례감을 잡아낸 서정화의 ‘소재의 구성(Material Container)’, ‘초경량’이라는 명확한 콘셉트를 물리적으로 구현한 김기현의 ‘1.3 체어’ 등 무엇 하나 놓치기 아까운 이야기가 의자마다 담겨 있다. 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정작 그 위의 비어 있는 부분, 그리고 마치 행간처럼 의자 사이에 감도는 그 무엇이 내내 신경 쓰였다.
그동안 많은 디자이너와 공예가, 건축가, 엔지니어가 도전했음에도 당신이 눈을 감고 의자를 생각하면 서울 태생의 의자가 잘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집이든 일터든 늘 앉는 의자를 생각해봐도 서울 태생의 의자보다는 아시아 어느 나라의 저임금 노동으로 생산된 의자가 더 많을 것이다. 어지간한 상업 공간이든 공공 장소든 한스 베그너(Hans Wegner), 알바 알토(Alvar Aalto), 아르네 야콥슨(Arne Jacobsen)이 디자인한 의자처럼 보이지만 역시나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만든 이름 모를 의자들로 가득하다. 자유로워 보이는 업무 공간을 자랑하는 빅테크 기업들과 감각 있는 스튜디오에서 유명한 ‘오리지널’ 의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서울 태생인 경우는 거의 없다.
서울의 의자들은 그 ‘오리지널’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시팅 서울에 아카이빙된 의자와 그 디자이너를 보면 오늘의 미디어를 장악한 유튜브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연기와 노래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실력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은 것이다. 비유하자면, 서울의 의자에 필요한 것은 연기력보다는 시노그래피(scenography), 코레오그래피(choreography)일 수 있다. 전형적인 건축이 땅에 기반을 두듯이 디자인된 의자도 토대가 필요하다. 그것이 무대이기도 하고 자리이기도 하다. 미학적으로나 실험적인 측면에서 탁월한 오브제라면 전시에 초대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오랫동안 감동을 주거나 몹시 친근해서 늘 곁에 두고 싶은 어떤 것으로 남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개별적인 오브제로서 의자에 대한 평가와 그것이 지닌 힘은 다른 차원이다. 그 힘은 개개의 의자 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넘어서 의자와 의자 사이, 그리고 앉는 부분이 말해주는 분위기이고 의자들과 주변을 연결시키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 ‘시팅 서울’이라는 이름의 아카이빙이 그런 역동성을 만들어 준다면 어떨까. ‘의자’가 아닌 ‘시팅’이라는 동사를 썼으니 말이다.
이 글에서 의자 자체를 둘러싼 역사와 사회문화적 의미를 이야기하고 그것과 시팅 서울을 연결시켰다면 흥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격리되고 비어 있고 불안한 시절이라서 ‘의자’, ‘앉음’보다는 사람이든 의자든 자리를 얻지 못하고 부유하는 이미지가 오래 기억된다. 사람 없는 전시장에 빼어난 의자들의 도열을 보면서 느낀 기묘한 감정은 비단 대유행 시기의 풍경으로만 넘길 수 없을 것 같다. 디자인, 제작, 창작이 정당한 평가를 받으며 이 의자들도 자리를 잡으려면 할 일이 많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Press
서울의 디자인 체어를 아카이빙하다
SPACE
건축 전문 잡지 <SPACE>와 나눈 서면 인터뷰
시팅 서울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송봉규(이하 BK) 개인적으로 몇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2019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디자인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동시대 의자들을 체계적으로 아카이브한 전시를 보며 ‘이제 서울에서도 서울에서 디자인된 의자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결과물과 디자이너들이 충분히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최근 비트라에서 발행한 『Atlas of Furniture Design』을 보면서 언젠가는 서울의 디자인 의자들도 동시대성을 지닌 자료로서 잘 아카이브되어 디자이너와 콜렉터(소비자) 모두에게 의미 있는 레퍼런스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양정모(이하 JM) 해외 가구 브랜드나 빈티지 가구, 이케아 등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소비자들의 의자에 대한 관심과 안목이 높아졌습니다. 최근에는 국내 디자이너나 작가의 의자를 찾는 소비자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내 의자 디자인을 수집해 온·오프라인으로 소개하고, 창작자와 소비자를 더 쉽게 연결할 수 있는 플랫폼이 생긴다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지금’, ‘서울’에서 만든 ‘의자’에 주목했는지 궁금합니다.
BK 몇 년 전부터 서울 리빙 신(Scene)에 불고 있는 북유럽 가구의 열풍 이후에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제는 각자의 취향이 좀 더 반영된 새로운 리빙 제품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중 하나가 서울에서 디자인된 디자이너들의 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멀리 본다면 이런 의자들이 해외에서 서울의 디자인 신을 바라볼 때 중요한 사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동호(이하 DH) 한국 가구 디자이너들의 약진이 두드러진 시기가 대략 최근 10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흐름을 지켜보면서 몇 해 전부터는 ‘이걸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떤 것이든 아카이빙되어 있을 때 힘이 생기고, 더 많은 기회와 소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우리를 한데 모아주는 상징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의자’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관심사죠. 결국 한 국가나 도시의 디자인 수준을 이야기할 때 ‘의자’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시팅 서울에서 보여준 의자는 형태, 소재, 기능이 각양각색입니다. 아카이브를 하면서 특별히 정한 기준이 있었나요?
BK 2000년 이후에 디자인된 의자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좀 더 다양한 의자들을 아카이브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고요. 기본적인 기준은 2000년 이후의 작품들 가운데서 ‘동시대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게 저희가 정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에요.
DH 아무래도 아카이빙을 하는 과정에서 저를 포함한 세 명의 취향이 알게 모르게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기능, 재료, 형태 등에서 최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의자에 사용된 재료와 소재가 얼마나 동시대적이고, 또 얼마나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고 있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JM 최대한 다양한 의자들을 아카이브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명확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의자들에 특히 관심이 갑니다.
여러 디자이너와 기획자가 참여했습니다. 어떻게 모이게 되었으며, 각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BK 처음에는 혼자서 조금씩 자료를 모으다가 아카이브에 관해 양정모 디자이너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이후 양정모 디자이너의 소개로 소동호 작가님이 합류하면서 지금의 팀이 만들어졌죠. 2020년 1월 겨울에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게 시작이었습니다. 특별히 정해진 역할은 없고, 전시나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적절히 역할을 나누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픽 디자인은 홍은주, 김형재 디자이너가 맡아주셨는데 예전부터 두 분이 디자인한 아카이브형 웹사이트들을 흥미롭게 봐왔기 때문에 이번 프로젝트에 꼭 함께하고 싶어 저희가 먼저 연락을 드렸습니다.
DH 각자 정해진 역할은 없었지만, 셋이 함께 의견을 나누며 아카이빙을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송봉규 실장님은 웹 아카이브의 토대를 만들며 그래픽 디자이너들과 소통했고, 양정모 디자이너는 이번 전시 공간 구성을 맡았습니다. 저는 디자이너들의 의자를 섭외하고 참여자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했어요. 그 외의 세세한 일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나누어 진행했습니다.
시팅 서울 프로젝트를 통해 발견한 ‘서울의 리빙 디자인 경향’은 무엇인가요?
BK 지금까지는 여전히 탐구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해석의 몫은 결국 이 전시를 보는 관람자들의 머릿속에 그려지길 기대하고 있어요. 예전에 셋이서 60개가 넘는 의자들을 한자리에 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각자의 머릿속에 ‘이게 서울(혹은 한국)의 디자인 아닐까’ 싶은 몇 가지 아련한 이미지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DH 아카이빙을 하면서 의자 카테고리의 다양성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스툴이나 다이닝 체어는 많은 편인데, 벤치나 소파, 라운지 체어, 락킹 체어 같은 유형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에요. 아무래도 독립 디자이너나 소규모 스튜디오의 작업이 많아서 그런 부분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리빙 디자인의 전반적인 경향으로 본다면, 아직까지는 의자의 기능적 역할보다 소재 중심의 미니멀리즘 경향이 좀 더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JM 아직까지는 최대한 다양한 의자를 아카이브하고 소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자료가 어느 정도 쌓이면 제작 연도, 소재 등 여러 카테고리로 나눠보며 경향을 파악해 볼 예정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해야 할 의자 3개만 꼽아주신다면?
DH 이번 전시에 선보인 16개의 의자는 각각 개별적으로도 특별하지만, 전시장 안에서 모두 함께 놓였을 때의 조합과 구성에서 또 다른 완성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세 작품을 꼽기에는 쉽지 않지만, 참고삼아 말씀드리자면 김현성 작가의 브라스 체어(Brass Chair)는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디자인한 작품이에요. 이전 버전과는 조금씩 다른 형태적 디테일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겁니다.
BK 참여한 모든 작품이 각자 뚜렷한 개성과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세 작품을 꼽자면,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문석진 디자이너의 커비처 체어(Curvature Chair), 이재하 디자이너의 웨지 체어(Wedge Chair), 그리고 이학민 디자이너의 파우 벤치(Paw Bench)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시팅 서울은 디자이너-생산자-사용자-컬렉터를 연결하는 데에도 목적이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
BK 제조 공장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곳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느낍니다. 또 최근에 만난 몇몇 건축가들은 새로운 가구를 찾고 있었어요. 해외 디자인 매체나 디자이너들 역시 서울의 생동감 있는 디자인 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흐름을 ‘의자’라는 아이템으로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팅서울 웹사이트에 디자이너들과 의자들이 잘 기록된다면, 생산자들과의 네트워크로도 확장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리두기 2.5단계 실행으로 아쉽게도 윈도우 전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혹 앞으로 다른 곳에서 전시를 할 계획은 없나요?
BK 지금은 전시가 끝난 뒤 바로 온양민속박물관으로 옮겨, 몇몇 의자를 추가해 다시 전시할 계획입니다. 그 이후에도 몇몇 아트페어나 미술관과 협의 중이에요. 앞으로는 1년에 한 번 정도 그해 새롭게 발표된 의자들을 소개하는 정기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팅 서울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될 예정인가요? 그렇다면 앞으로 계획된 다른 프로그램이 있나요?
BK 원래는 2000년부터 2020년까지의 의자들을 웹사이트에 기록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는데, 좋은 기회가 생겨 서울역 TMO에서 전시를 열게 됐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1차 목표는 온라인 아카이브를 더 촘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현재 약 100여 점의 의자가 아카이브 진행 중이고, 빠르면 올해 안이나 내년 초쯤 아카이브 중심의 웹사이트를 정식 오픈할 계획이에요. 앞으로는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전시나 출판 같은 프로젝트도 함께 전개해 나가려고 합니다. 또 김상규 교수님, 구병준 대표님, 육상수 대표님 등 여러 어드바이저들께 조언을 받으며, 아카이브의 방향성과 확장된 개념에 대해서도 계속 논의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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